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리 채플린 (문단 편집) === 여자 관계 === 채플린은 영화계에 남긴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여러 여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만났던 여성 대다수의 나이가 1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컸다.[* 동양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성의 조혼을 선호하는 풍습이 있었으나 서양, 특히 유럽 쪽은 이미 근대시대부터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그래서 사생활의 문란함이나 상대 여성들의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때문에 [[에페보필리아]]를 연구하는 측면에서도 꽤 무게감을 갖는 인물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0zDOub31Q|채플린의 결혼 생활]] 채플린의 딸 중엔 그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70살이나 차이가 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남긴 것은 채플린 본인의 무분별한 성 생활도 문제였지만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 지지대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무]] 알레르기가 있어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 중 발췌.]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 '''헤티 켈리'''([[1893년]] ~ [[1918년]]) 채플린이 카노 극단의 스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1910년에 만난 [[첫사랑]]. 당시 [[런던]]의 한 연극단에서 무용수로 일하던 15세 소녀였지만, 헤티의 부모가 채플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과 다섯 번의 데이트만 하고 헤어졌다. 켈리와의 비극적인 첫사랑이 훗날 채플린의 여자 관계[* 10대 중,후반의 여성들만을 골라 사귄 것, 사귀고 있는 연인과 헤어질 때를 대비해 다른 여자들과 양다리를 걸친 것.]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걸로 알려져있다.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에드너 퍼바이언스'''([[1895년]] ~ [[1958년]]) 19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1918년 채플린이 밀드러드 해리스와 결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에사네이 영화사의 비서였으나 채플린의 추천으로 1915년 여배우로 데뷔했으며 에사네이~퍼스트 내셔널 시기의 거의 모든 채플린 영화에서 상대역[* 실제로 유튜브에서 Charlie Chaplin이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대부분의 짧은 콩트류의 영상에서 거의 모든 여주인공은 다 이 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으로 출연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만든 첫 영화인 '[[파리(프랑스)|파리]]의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파리의 여인이 흥행에 실패[* 그런데 이 실패에는 의외로 에드너 퍼바이언스 본인의 이미지에 타격이 있던 대형 스캔들 사건이 한 몫하기도 했다. 평소 에드너는 그녀의 절친했던 여배우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 1893 ~ 1930)[* 키스턴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로서 활동했던 배우로 찰리 채플린과 [[로스코 아버클]] 영화의 초기 여주인공이기도 했다. 1910년대 후반에는 키스턴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웠을 정도로 잘나갔으나 1922년 남자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의 사망 사건에 연루된 것(메이블 노먼드는 심한 [[코카인]] 중독자였고 윌리엄은 그녀가 코카인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는데 코카인 공급책들이 윌리엄 테일러로 인해 주요 고객인 메이블 노먼드를 잃게되자 앙심을 품고 살인 청부업자를 시켜서 윌리엄 테일러를 죽였다.)과 코틀런즈 다인즈의 총격 사건으로 인해 인기가 급락, 1926년에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30년, [[결핵]]으로 3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와 함께 석유 재벌 코틀런드 다인즈(Courtland Dines)라는 남자와 서로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24년 메이블의 운전기사였던 그리어(Greer)라는 남자가 다인즈를 총으로 쏜 사건[* 범행 사유는 그리어가 재판 출석을 거부함에 따라 끝내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리어가 메이블에 대해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고용주인 메이블은 이에 대해 부인했다.]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에드너는 메이블과 함께 [[스폰서|순진한 재벌 남자]]를 [[꽃뱀|적당히 꼬시고 놀려고 했던 여자]]라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런 악평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알코올 의존증|매일을 술에 찌들어 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겨서 자신의 회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첫 영화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투입시켜 배우로서의 길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려는 노력을 보여준 것이었다.]하고, 찰리 채플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다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주연까지 맡았으나, 이 영화는 끝내 개봉되지 못하고 파기되고 말았고,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그녀의 헐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사실, 워낙 찰리 채플린과 가까운 사이이다보니, 후술할 찰리 채플린이 두번째 결혼 상대였던 리터 그레이와 이혼할 때 일부 언론에서는 이혼 사유로 에드너 퍼바이언스와 찰리 채플린의 친밀했던 관계를 이유로 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를 은퇴한 후, 항공 조종사였던 존 P. 스콰이어와 결혼해서 7년만에 사별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향년 62세로 타계한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죽은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저의 모든 일이 시작될 때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라며, 그녀와의 좋은 기억을 술회하기도 했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퇴사한 이후에도 꾸준히 연금 같은 형식으로 소량의 월급을 줬다고 한다.] * '''밀드러드 해리스'''([[1901년]] ~ [[1944년]]) 채플린이 29세이던 1918년에 처음 아내로 맞은 아역배우(당시 16세). 밀드러드는 결혼 후 채플린의 첫 아이였던 노먼을 낳았지만 노먼은 태어난지 3일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후 MGM 창립자 루이스 메이어는 채플린의 명성을 보고 채플린과 결혼한 밀드러드에게 접근해 그녀와의 영화 출연 계약을 따냈다.[* 이에 찰리 채플린은 루이스 메이어를 벼르고 있었는데, 한 호텔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자 채플린이 먼저 내 명성을 이용했다며 메이어를 도발했고 메이어는 채플린에게 변태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화가 난 채플린이 주먹을 날렸고 노동자 출신의 메이어가 반격하여 채플린을 주먹 한방에 KO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채플린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여배우인 밀드러드가 자신의 명성을 아용하기 위해 거짓으로 임신했다 속이고 자신과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밀드러드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채플린은 2달 동안 밀드러드와 사는 집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고 밀드러드에게 촤소한의 생활비만 주었으며 이조차 밀드러드가 자신이 준 생활비로 무엇을 왜 구매했는지 보고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자 밀드러드는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외모를 엄청나게 꾸미는데 집중했는데 돈에 인색했던 채플린은 이를 보고 더 화가 나서 밀드러드에게 절대로 동시에 3개 이상의 드레스를 갖고 있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 했다고. 그러면서도 찰리 채플린은 밀드러드 해리스와 같이 밖에 나갔을 때면 밀드러드가 행여나 다른 남자를 쳐다볼까봐 항상 시선을 바닥에 두라고 명령했으며 밀드러드에게 만약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결국 말드러드 해리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사유로 찰리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레즈비언]]이며 다른 여성과 외도를 했다고 주장하며 재산 분할을 거부했다.[* 찰리 채플린은 외도 상대로 의심되는 사람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대중들은 러시아 출신 여배우 겸 시나리오 작가였던 양성애자의 알라 나지모바(1879 ~ 1945)를 의심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은 1920년에 마무리되었고 법정은 밀드러드 해리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채플린에게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던 집의 소유권과 10만 달러의 위자료를 밀드러드에게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밀드러드 해리스는 [[프랭크 카프라]] 초기작에도 나와 좋은 연기를 펼치는 등 꽤 괜찮은 배우였지만, 크게 대성하지 못했고, 194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안타깝게도 그녀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의 필름이 거의 소실된 상황이라 그녀의 연기를 현 시점에서 보기가 어렵다. * '''리터 그레이'''([[1908년]] ~ [[1995년]]) 1924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 1920년 촬영된 《키드》에서 단역 천사들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채플린과 밀회를 시작한 때는 무려 '''12살'''이었다(…). 밀드러드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6세였다. 《황금광 시대》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조지아 헤일로 교체되었다. 리터 그레이가 찰리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찰리 채플린은 이미 리터에게 관심이 식은 후였고 조지아 헤일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채플린은 리터에게 돈을 주며 아이를 [[낙태]]하라고 요구했지만 리터의 가족 중 한 명이 리터의 임신 소식을 전해듣고 찰리 채플린에게 총을 들고 찾아가 리터를 책임지라며 만약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아동 성범죄]]자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찰리 채플린은 1924년에 리터 그레이와 성급히 결혼하였고 결혼 직후부터 찰리는 리터에게 "이 결혼은 얼마 안갈거야" "곧 나와 사는 것을 질리게 만들어 줄게"라는 [[가스라이팅|폭언을 내뱉으며 그녀를 압박했다고 한다.]] 이후 리터는 1925년과 1926년에 각각 시드니와 찰스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결국, 1927년 채플린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후 두 사람의 이혼 소송에 관한 약 50페이지의 법정 기록이 세상에 공개됐는데 이 기록에 실린 리터 그레이의 주장에 의하면 찰리 채플린이 자신에게 [[쓰리썸|세 명이 함께 성관계를 갖자]]는 등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성적 요구를 했다고 한다. 리터가 이를 거부하자 찰리는 자기가 이전에 사귀었던 여배우들은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줬는데 너는 왜 들어주지 못하냐고 화룰 냈다고, 이혼 소송 결과 채플린은 리터에게 60만 달러, 아들들인 시드니와 찰스에게 각각 10만 달러 씩 총 8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는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자료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혼 소송은 [[미국]] 연방 정부에서 채플린을 탈세 혐의로 제기한 소송과 병행되었고, 덕분에 당시 작업하던 '서커스'의 개봉이 늦춰지는 원인이 되었다. 찰리 채플린과의 이혼 이후, 그녀는 위자료를 가지고 [[나이트클럽]]을 열었으나 망했고 이후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이혼하였다. 그 후 평생을 홀로 살다가 1995년 암으로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리터 그레이는 말년에 "찰리 채플린은 가난과 상처로 얼룩진 가정 환경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상 찰리 채플린이 만나왔던 여자들 가운데 찰리 채플린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여자였으며 실제로 그 두꺼운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에서도 나름 부인이었던 리터 그레이에 대한 서술은 '''단 한 줄'''밖에 기재가 안되어 있다. 후술할 1992년 영화 《채플린》에서도 그녀에 대한 묘사는 1분도 되지 않는다. * '''[[폴렛 가더드]]'''([[1910년]] ~ [[1990년]]) [[뉴욕]] 출신의 배우.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바나나]]를 훔치는 "집 없는 소녀"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매리언 데이비스처럼 지그펠드 쇼라는 1910년대 브로드웨이 쇼 출신이다. 목재 기업 사장인 첫 남편과는 1929년에 헤어졌고, 1932년 이혼이 완료됐다. 1932년부터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해 《모던 타임즈》가 개봉한 연도인 1936년에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찰리에게는 폴렛이 세 번째 부인, 폴렛에게는 찰리가 두 번째 남편이었다. 또한 결혼했을때 나이가 26세로 채플린이 결혼한 상대 중 유일하게 10대가 아닌 여성이었다. 결혼 생활은 밀드러드나 리타보다 길었지만 그래도 짧게 끝나서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1940년에 이혼했는데, 위의 두 여인들과 달리 매우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후 플렛 가더드는 "찰리는 이혼을 원하지 않았어요. 이혼을 원한건 저였죠. 천재랑은 살기 힘들어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의 높은 정신적 레벨을 맞춰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라고 밝혔다. 플랫 가더드는 찰리 채플린과 이혼 후에도 파라마운트 영화사 등에서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1958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독일]]의 [[소설가]]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재혼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고, 채플린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80세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찰스와 폴렛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폴렛 본인도 이혼 후 한 번 유산한 이후로는 자식이 없었다.] * '''조앤 배리'''([[1920년]] ~ [[2007년]]) 본명은 메어리 루이즈 그리블(Mary Louise Gribble). 1942년에 잠시 사귄 여성. 채플린은 이 여성을 배우로 키우려고 했는데, 배리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 얼마 못 가 결별했다. 이후 배리는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혈액형]] 검사 결과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판명[* 유전법칙에 따라 혈액형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상태.(추정 부(父)인 채플린은 O형, 베리는 A형, 아이는 B형. 정말 친자였다면 A형과 O형만 나올 수 있다. B형 유전자는 A형 및 O형과 염기서열이 다수 다르기 때문에 돌연변이를 고려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배심제]]의 폐해인 비논리적 판단에 따라 채플린을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했고, 결국 채플린은 판결에 따라 그 아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를 주며 부양해야 했다. 채플린은 이 재판에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렸고 이후 비미활동위원회 조사 등과 더불어, [[미국]]에 급짜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배리도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정신병 증세의 악화[* 당시 나이 33세인데도, 어린이 샌들과 어린이용 장난감 반지를 끼고 돌아다녔다고 한다.]로 1953년에 강제 격리[* 이때 그녀의 후견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당시 10살이던 그녀의 딸 캐롤 앤 배리(Carol Ann Barry)였다. 캐롤은 상술한 채플린의 친자 소송 결과에 따라 21살까지 양육비를 지급받게 된 대상자였고, 아마도 후견인으로서 정신병 질환의 어머니를 보살피는데 이 양육비가 어느 정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되었고, 이후로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잊혀가다가 2007년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40년 후 채플린의 FBI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FBI가 배리의 친자소송 배후에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당시 채플린을 몰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짜던 FBI 국장 [[에드거 후버]]가 채플린에게 쫒겨나 그를 증오하고 있던 조앤 배리에게 접근하여 친자소송을 제안한 것이었다.[[https://newsen.com/news_view.php?uid=201302101122381110|#]] * '''우나 오닐'''([[1925년]] ~ [[1991년]])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가장 유명하다.]의 딸로 채플린의 마지막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다.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고, 채플린과는 무려 36살 차이였다. 다시 말해 이때 찰리 채플린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녀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채플린보다 겨우 1살 많다.''' 결국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그러나 이 점은 유진 오닐에게 책임이 큰데, 자세한 것은 [[유진 오닐]] 항목을 참고할 것. 채플린은 오닐과 결혼을 할 때 평소 자신을 '미국에 배은망덕한 영국인'이라고 욕하던 연예계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Hedda Hopper)를 물 먹이기 위해 라이벌인 루엘러 파슨스(Louella Parsons)에게 자신의 결혼 특종 소스를 줬는데 이에 분노한 하퍼는 그간 자신의 정보원들을 통해 수집한 채플린의 온갖 정보를 [[FBI]]에 넘겨버렸고, 친공산주의자 성향으로 보일 수 있는 채플린의 행적들을 [[FBI]]로부터 제공 받아 기사화하며 반채플린 여론을 조성했다. 이는 1952년의 재입국 금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채플린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장녀는 제럴딘(1944).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찰스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에 [[유방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폴라 네그리[* 폴란드 출신의 여배우. 1923년 폴라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채플린과 연인 관계가 되었고 둘이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다. 채플린은 1년 후인 1924년 리터 그레이와 결혼했다.], 루이즈 브룩스[* [[플래퍼]] 시대 아이콘으로 유명했던 배우로 플래퍼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 채플린이 두번째 부인인 리터 그레이와 별거 중일 때 잠시 사귀었다고 한다.] 등을 포함해서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매리언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